본문 바로가기

JUSTICE 정의란 무엇인가 - 마이클 샌델

by _마디 2016. 1. 25.

아이를 출산하거나 전쟁을 하는 것처럼 서로 이질적으로 보이는 행위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도의 대리 출산과 앤드루 카네기가 남북전쟁에서 자기 대신 싸울 군인을 고용한 사례에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 사례에서 옳고 그름을 생각하다 보면 정의에 대해 둘로 갈라져 경쟁하는 두 가지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자유 시장에서 우리가 하는 선택은 얼마나 자유로울까? 세상에는 시장에서 취급하는 것이 영예롭지 못하며 돈으로 살 수 없는 미덕과 고귀한 재화가 존재할까?



나는 이 책의 첫머리에서,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접근법을 소개했다.

그중 하나인 공리주의 접근법은 정의의 개념을 규정하고 무엇이 옳은 일인가 판단하려면 사회 전체의 복지를 극대화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번째로 소개한 정의를 자유와 연관시키는 접근법은 자유지상주의자들의 관련사례를 통해 설명했다. 이들은 소득과 부의 공정한 분배는 규제 없는 시장에서 재화와 용역의 자유로운 교환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들 주장에 따르면, 시장을 규제하는 행위는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침해하기 때문에 부당하다.

세번째는 정의란 사람들에게 도덕적으로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주는 것, 즉 미덕을 포상하고 장려하는 방향으로 재화를 배분해야 한다는 접근법이다. 


몇 년 전, 스프라이트 음료 광고에 이런 문구가 있었다. '당신의 갈증에 복종하라' ....

사람들은 흔히 인간의 행동 형성에서 천성과 교육의 역할을 두고 논쟁을 벌인다. 스프라이트를 먹고 싶다는 욕구는 유전자에 새겨져 있는 욕구일까, 아니면 광고에 자극받은 욕구일까? 



자유를 중시한 칸트의 '자유'는 다소 정의가 복잡하다. 정언명령과 가언명령, 의무와 경향성, 자율과 타율, 예지적 영역과 감각적 영역 등의 대비를 이해해야 한다.

그에게 자유란 무언가를 이루기위한 욕구로써의 행위가 아니라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는 행동이다.



철학자들은 벽창호가 많다.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기 위해서는 이해가 안되는 경우에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가령 임마누엘 칸트는 거짓말에 상당히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심지어 그는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에 의해 자신의 집에 친구가 숨어 있고, 살인자가 문 앞에 와서 친구를 찾는 상황이 오더라도 살인자에게 거짓말을 하는 행위는 옳지 못한 행위라고 단정한다. 옳은 원칙에 위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 칸트 본인도 이것이 도덕적이라고 하지는 못 할 것이다. 자신이 내뱉은 말을 철회하기는 힘들다. 자존심인지 모르겠으나 분명히 어떤 심(心)이 작용한다. 권위자이거나 명성있는 자라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칸트(철학자)는 벽창호의 길을 걷는다. 

인간의 양면성이라든지 모순되는 성질을 알면서도 그럴 수 밖에 없다. 인정이라는 게 그만큼 힘들다.



존 롤스 - 무지의 장막 뒤에서의 합의. 공리주의는 나올 수 없다.



에티켓 칼럼니스트 주디스 마틴(일명 '매너 양')은 감사 편지를 쓰는 습관이 사라진 것을 유감스러워한다. 그녀는 요즘 사람들은 예의를 차리는 것보다 마음을 중요시한다고 지적했다. 고마움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지, 예의라는 형식을 차리는 수고는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매너 양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저는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적절한 행동을 하다 보면 미덕이 깃든 마음이 피어나는 것을 느낍니다." 이게 바로 도덕적 미덕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다.




<

.................

 그런덴 이런 것들이 다 정의와 무슨 상관일까? 이 물음에 대답하기위해,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온 애초의 질문을 다시 떠올려 보자. 우리는 지금까지 모든 의무와 책임이 의지나 선택의 행동에서 나왔는지 알아내고자 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연대 의무나 구성원 의무는 선택과 관련 없는 이유, 즉 우리 삶과 우리가 소속된 공동체를 해석하는 서사와 관련된 이유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도덕적 행위자에 대한 서사적 설명, 그리고 의지와 합의를 강조하는 설명 사이의 논쟁에서 정확한 쟁점은 무엇일까? 한 가지 쟁점은 인간의 자유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있다. 연대와 구성원 의무를 보여 주는 예를 가만히 생각하다 보면 거부감이 들 수도 있다.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이 책을 읽는 당신도 자신이 선택하지도 않은 도덕에 얽매인다는 생각을 좋아하지 않거나 신뢰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애국, 연대, 집단적 책임 등이 요구될 때 거부감이 들거나, 그러한 요구를 일종의 합의에서 나오는 것으로 재해석하고 싶어 한다. 그런 요구를 거부하거나 재해석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까닭은 그래야 자유라는 익숙한 개념과의 일관성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자유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도덕에 얽매이지 않으며, 자신을 강제하는 의무는 스스로 정하는 것이라 해석되곤 한다. 


(((★ 개인생각-> 일반적인 관념, 통념을 지키고 싶어하는 인간의 성향을 언급하면서,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정의"가 사실은 그것이 아닐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하는 부분이 아닐까?? 작가는 옛날 철학자들의 사상을 언급하면서 조금씩 자신의 생각을 개입시키고 독자들에게 주입한다. 본인이 하고 싶은 진짜 말을 은연중에 말하는 부분처럼 느껴졌다.

 작가는 책의 시작부터해서 9장 여기까지 아주 천천히, 순차적으로 조금씩 세밀하게.. 정의에 대한 정의에 다가가고 있다. 정의라는 단어가 장을 넘어갈수록 조금씩 구체적으로 윤곽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대단한 드라이브 능력이다.★)))


 나는 앞의 예에서, 그리고 이 책에 제시한 다른 예에서, 자유에 관한 그런 사고방식에는 결함이 있음을 지적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유만이 아니다. 정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또한 문제가 된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정의에 대한 두 가지 사고방식을 다시 떠올려보자. 칸트와 롤스는 권리가 선에 앞선다고 보았다. 의무와 권리를 규정하는 정의의 원칙은 좋은 삶을 규정하는 여러 관념 사이에서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칸트는 도덕법에 도달하려면 우연히 결정되는 이해관계와 목적을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롤스는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목적, 애착, 그리고 좋은 삶에 대한 주관적 견해를 배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무지의 장막 뒤에서 정의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정의에 관한 이런 사고방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와는 맞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의 원칙이 좋은 삶에 대한 여러 견해 사이에서 중립을 지킬 수 있다거나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정당한 헌법의 목적 중 하나는 좋은 시민, 좋은 인격을 키우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의에 대한 사유란 사회가 배분하는 공직, 영예, 권리, 기회 등의 의미를 숙고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칸트와 롤스가 정의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방식을 거부한 이유 중 하나는 자유의 여지를 남겨 두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헌법이 좋은 인격을 형성하거나 좋은 삶을 규정하려 든다면, 사람들에게 타인의 가치를 강요할 위험이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런 헌법은 개인을 스스로 자기 목적을 선택할 능력을 가진 자유롭고 독립된 자아로 존중하지 않는다.


 자유에 관한 칸트와 롤스의 이 같은 사고방식이 옳다면, 이들이 말하는 정의도 옳을 것이다. 우리는 자유로운 선택권을 지닌 독립된 존재이기에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도덕에 구속되지 않는다면, 우리에겐 여러 목적으로부터 중립적인 권리의 틀이 필요하다. 그리고 자아가 목적에 앞선다면, 자아의 권리는 분명 선에 앞설 것이다.


 하지만 만약 도덕적 행위자로서의 서사적 개념이 더욱 설득력 있다면, 정의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선(좋음)에 대해 사유할 때 우리 정체성의 근원인 공동체의 선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면, 중립을 갈망하는 태도는 잘못되었을 수 있다. 좋은 삶을 생각해 보지 않고 정의를 생각하기란 불가능하거나 어쩌면 바람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정의에 대한 공개 담론에서 좋은 삶의 개념을 이야기할라치면, 탐탁지 않게 생각하거나 심지어 질색하는 사람도 있다. 미국처럼 다원화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최선의 삶을 규정하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자유주의 정치론은 정치와 법을 도덕적·종교적 논란으로부터 분리하기 위해 탄생했다. 칸트와 롤스의 철학은 그러한 의도를 과감히, 또한 더 없이 분명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이러한 의도는 성공할 수 없다. 정의와 권리에 관한 뜨거운 쟁점 중 상당수가 도덕적·종교적으로 논란이 되는 주제를 피하지 못한다. 시민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할 때, 좋은 삶에 관한 여러 견해를 늘 빼놓을 수는 없다. 설령 가능하다 해도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


 민주 시민에게 공적 영역에 들어갈 때는 도덕적·종교적 신념을 내려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관용과 상호 존중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가능하지도 않은 중립을 가장한 채 중요한 공적 문제를 결정하는 행위는 반발과 분노를 일으키기 십상이다. 중요한 도덕 문제에 정치가 개입하지 않으면 시민의 삶은 저하된다. 사회는 편협하고 배타적인 도덕주의로 흐르기 쉬워진다.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이 건드리기 두려워하는 곳에는 근본주의자들이 몰려들기 마련이다.


 정의에 대한 토론이 어쩔 수 없이 본질적인 도덕 문제로 빠지게 마련이라면, 그 논의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공개적인 선의 논의가 종교적 논쟁으로 흐르지 않을 수 있을까? 도덕적인 측면을 보다 많이 다루는 공개 토론은 어떤 모습이며, 우리가 익히 보아 온 정치 토론과 어떻게 다를까? 이것들은 단순히 철학적 질문에 그치지 않는다. 이것들은 정치 담론에 활기를 불어넣고 시민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필요한 핵심 질문이다.


(((★ 종교를 빼놓고 정의를 논할 수 없다. 라는 생각을 하게된 동기나 출발점은 많이 다르지만 이 한문장에는 다분히 동의한다.★)))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버드 말하기 수업 - 리웨이원  (0) 2016.04.10
서시 - 윤동주  (0) 2016.02.14
동지  (0) 2015.12.22
[노래]사의 찬미  (0) 2015.12.19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얉은 지식 (역사,경제,정치,사회,윤리)  (1) 2015.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