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54-56
'푸조 SA'가 존재한다고 말할 때, 이것은 무슨 뜻일까? 푸조 차들이 많이 있지만 그것이 곧 회사는 아니다. 설사 세계에 있는 모든 푸조 차들이 폐차로 버려져서 고철로 팔린다해도 푸조SA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새로운 차를 생산하고 연례 실적 보고서를 발표할 것이다. 이 회사는 공장과 설비, 전시장을 소유하고 있고 정비공, 회계사, 비서를 고용하고 있지만, 이 모두를 합친다고 해서 곧 푸조가 되는 것도 아니다.
혹 재앙이 닥쳐서 푸조의 임직원 전원이 사망하고 조립 라인과 중역 사무실이 모두 파괴될 수 있겠지만, 그럴 때에도 회사는 돈을 빌리고 새 직원을 고용하고 공장을 새로 짓고 기계설비를 새로 구입할 수 있다. 경영자가 모두 해고되고 주식이 모두 팔릴지라도 회사 자체는 그대로 있을 것이다.
이것은 푸조 SA가 불사신이라거나 불멸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만일 판사가 해산판결을 내린다면, 공장도 그대로 서 있고 노동자와 회계사, 경영자와 주주는 계속 살아 있더라도 푸조 SA는 순식간에 사라질 것이다. 한마디로 푸조 SA는 물질세계와 본질적인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게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푸조는 우리의 집단적 상상력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변호사들은 이를 '법적인 허구'라 부른다. 이것은 손으로 가리킬 수 없다. 물리적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적 실체로서는 존재란다. 당신이나 나와 마찬가지로 이 회사는 그것이 운영되는 국가의 법에 제약된다. 은행계좌를 열고 자산을 소유할 수 있다. 세금을 내고, 소송의 대상이 되며, 심지어 회사를 소유하거나 거기서 일하는 사람과 별개로 기소당할 수도 있다. 푸조는 '유한(책임)회사' 라는 특별한 법적 허구의 산물이다. 이런 회사의 여면에는 인류의 가장 독창적인 발명으로 꼽히는 개념이 존재한다.
p134-136
좀 더 쉬운 삶을 추구한 결과 더 어렵게 되어버린 셈이었고, 이것이 마지막도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 중 상당수는 돈을 많이 벌어 35세에 은퇴해서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겠다고 다짐하면서 유수 회사들에 들어가 힘들게 일한다. 하지만 막상 그 나이가 되면 거액의 주택융자, 학교에 다니는 자녀, 적어도 두 대의 차가 있어야 하는 교외의 집, 정말 좋은 와인과 멋진 해외 휴가가 없다면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들이 뭘 어떻게 할까? 뿌리채소나 캐는 삶으로 돌아갈까? 이들은 노력을 배가해서 노예 같은 노동을 계속한다.
역사의 몇 안 되는 철칙 가운데 하나는 사치품은 필수품이 되고 새로운 의무를 낳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일단 사치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다음에는 의존하기 시작한다. 마침내는 그것 없이 살 수 없는 지경이 된다. 우리 시대의 친숙한 예를 또 하나 들어보자. 지난 몇십 년간 우리는 시간을 절약하는 기계를 무수히 발명했다. 세탁기, 진공청소기, 식기세척기, 전화, 휴대전화, 컴퓨터, 이메일..... 이들 기계는 삶을 더 여유 있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과거엔 편지를 쓰고 주소를 적고 봉투에 우표를 붙이고 우편함에 가져가는 데 몇 날 몇 주가 걸렸다. 답장을 받는 데는 며칠, 몇 주, 심지어 몇 개월이 걸렸다. 요즘 나는 이메일을 휘갈겨 쓰고 지구 반대편으로 전송한 다음 몇 분 후에 답장을 받을 수 있다. 과거의 모든 수고와 시간을 절약했다. 하지만 내가 좀 더 느긋한 삶을 살고 있는가?
슬프게도 그렇지 못하다. 종이 우편물 시대에 편지를 쓸 때는 대개 뭔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뿐이었다. 머릿속에 처음 생각나는 것을 그대로 적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심사숙고했다. 그리고 역시 그렇게 심사숙고한 답장을 받을 것으로 기대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주고받는 편지가 한달에 몇 통 되지 않았으며 당장 답장을 해야 한다는 강요를 받지도 않았다. 오늘날 나는 매일 열 통이 넘는 메일을 받고, 상대방은 모두 즉각적인 답을 기대하고 있다. 우리는 시간을 절약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인생이 돌아가는 속도를 과거보다 열 배 빠르게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상에는 불안과 걱정이 넘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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