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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인물

[인물탐구]다면적 존재를 통해 나를 본다. 에드바르 뭉크

by _마디 2025. 1. 6.

[인물탐구] 에드바르 뭉크

 
에드바르 뭉크(1863~1944)는 노르웨이 출신으로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으며 평생을 정신질환에 시달렸다는 뭉크의 이야기는 스스로의 귀를 자른 빈센트 반 고흐의 일화와 함께 한국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미술사의 대표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런 그의 그림이 세간에 처음 알려졌을 때 '악령이 들린 그림'이라는 평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화풍은 대세가 되었고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화가가 되었습니다. 뭉크는 일생동안 2만 여점을 그린 다작 화가이기도 합니다.

 

3번째 인물탐구, 이번에는 뭉크의 생애를 간략하게 들여다 보았습니다.

 


 

1. 뭉크의 생애

 
유년 시절

죽은 어머니와 아이 - 뭉크

가난한 도시에서 태어난 뭉크는 스스로가 '일생을 죽음과 함께 있었다'고 평가했을만큼 어린 시절부터 죽음과 가까운 삶을 살았습니다. 뭉크의 엄마는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죽었고 그 충격으로 인해 뭉크의 아버지는 종교에 빠져 광신도가 되어 버립니다. 자녀들에게 밤마다 공포소설을 읽어주거나 악마가 씌었다는 말을 하며 정서적으로 학대합니다. 
이로 인해 어린 나이의 뭉크는 극도의 불안감과 공포감을 느끼며 악마 같은 환영을 보는 등 불안장애에 시달리게 됩니다. 
뭉크의 불행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일찍 엄마를 여의고 굉장히 의지를 하던 한 살 터울의 누나 소피에가 15살의 나이로 폐결핵으로 죽게 됩니다. 심지어 여동생 라우라도 정신질환에 시달려 정신병원에 입원을 합니다.
뭉크의 유년 시절은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불우한 생애였죠.
 

병실에서의 죽음 - 뭉크

 
 
재능의 발견

아침 - 뭉크

 
뭉크가 어느정도 성장했을 때, 이모를 통해 그림에 흥미를 갖기 시작합니다. 비록 아버지의 바람대로 기술학교에 입학했지만 적성이 맞지 않아 바로 그만두고 미술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1889년에는 첫 개인전을 열고 받은 장학금으로 파리로 유학을 떠나기도 합니다. 그곳에서 고갱, 세잔, 고흐 등 후기인상주의파의 영향을 받습니다. 특히 빈센트 반 고흐에게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별이 빛나는 밤 - 뭉크

 
반 고흐의 작품을 오마주 하면서 이 작품은 마치 나의 자화상과 같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림에 재능을 발견하고 승승장구할 줄 알았던 뭉크에게 또 한번의 거대한 시련이 닥칩니다. 1889년 11월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사망한 것입니다. 뭉크는 극심한 자살충동에 시달리며 극도의 불안증세가 생기게 됩니다. 모자를 똑바로 썼다는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밖에 나가지 못 할 정도로 강박증이 심해집니다.
 

생클루의 밤 - 뭉크

 
한편으로는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화가로서의 뭉크의 화풍을 굳히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뭉크는 스스로 내면에서 요동치는 감정을 시각적으로 담아내는 화가가 되기로 다짐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뭉크가 베를린 미술계를 발칵 뒤집어 놓는 사건이 생깁니다.
28살, 배를린에서 개인전을 개최했을 때입니다.
 

여름밤의 신비 - 뭉크

 
뭉크의 암울하고 섬뜩한 화풍에 사람들이 깜짝 놀란 것인데요, '악마가 그린 그림', '악령이 들린 그림'이라는 혹평이 쏟아졌습니다. 당시 독일은 전통화풍과 모더니즘이 충돌하기 시작하던 시기였고 다른 곳보다 모더니즘의 화풍이 뎌디게 확산되고 있었습니다. 뭉크의 화풍을 처음 본 사람들이 충격에 빠질 수 밖에 없었죠.
결국 뭉크의 개인전은 도중에 중단되고 맙니다.
 
그러나 뭉크는 오히려 이런 상황을 즐겼다고 합니다. 호평이든 혹평이든 뭉크의 그림은 사람들 사이에 빠르게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단 시간 내에 유명인이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뭉크가 다른 나라에 몇 차례 전시회를 열고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엄청나게 유명한 화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표현주의의 선구자격이 된 것입니다.
 

절규 - 뭉크

뭉크는 1893년부터 <생의 프리즈>라는 연작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생의 프리즈>연작을 '삶과 죽음과 사랑에 관한 시’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연작 중에 가장 잘 알려진 뭉크의 그림인 <절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절규 속에 그려진 뭉크의 상태를 보면 공황발작이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작가가 미쳤다는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사실 <절규>의 배경이 에케베르크 언덕인 이유에는 사연이 있었습니다. 많이 알려져 있다시피 절규는 여러 버전이 존재하는데요. 절규뿐만 아니라 뭉크의 다른 많은 그림도 에케베르크 언덕을 배경으로 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이 언덕에서 뭉크의 가족들의 장례식이 치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뭉크는 인지를 하고, 혹은 인지를 못하고 강박적으로 이 장소를 그렸던 것이죠.

“핏속에서 자연이 절규하고 
있었다. 나는 한계점에 와 있었다”

 

이맘때쯤 뭉크 스스로도 자신이 광기에 사로잡힌 미친 사람이라고 인지를 하고 있었습니다. 불안과 공포를 달래기 위한 수단으로 그림을 그렸고 자기 작품이 팔릴 때마다 같은 그림을 다시 그리기도 했습니다. 작품이 팔리는 것을 싫어했고 자기 작품에 집착했죠. 심지어 작품을 산 사람에게 가서 작품을 다시 빌려오기도 했습니다.





2. 뭉크가 사랑했던 세명의 여인들

 
뭉크에게 큰 영향을 끼친 세 명의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각각 뭉크의 정신세계와 작품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i. 밀리 타올로브

창 옆에서의 키스 - 뭉크

뭉크의 첫사랑 밀리 타올로브는 유부녀였습니다. 둘은 금단의 사랑의 시작했고 6년 동안 불륜을 이어갔고, 뭉크는 그녀가 언젠간 이혼하고 자기에게 올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녀는 드디어 이혼을 했으나 뭉크가 아닌 다른 남자와 재혼을 했고 큰 상처를 받고 여성혐오자가 되었습니다.

 

이별 - 뭉크

첫사랑 밀리와 뼈아픈 이별을 했음에도 뭉크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그녀는 평생동안 작품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흡혈귀 - 뭉크

이 작품은 여성혐오자가 된 뭉크, 그것을 적나라헤게 보여줍니다. 여성이 쾌락을 주는 동시에 공포와 고통을 주는 존재임을 표현한 것입니다.

 

 

 

ii. 다그니 율

뭉크의 두번째 사랑은 다그니 율은, 그녀가 베를린으로 피아노를 배우러 오면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아하면서 매력적인 다그니 율은 모든 남자들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뭉크도 그녀를 사랑하게 되고 잠시 사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뭉크의 친구와 사랑에 빠지고 결국 결혼까지 하게 됩니다. 그 상황을 지켜본 뭉크는 질투의 화신이 되었고 <질투>라는 그림을 그립니다.

 

질투 - 뭉크

얼굴이 정면으로 보이는 남자는 뭉크 자신이 아니라 다그니 율과 결혼한 뭉크의 친구입니다. 그 뒤로 마주보고 있는 연인이 바로 다그니 율과 뭉크 자신입니다. 뭉크는 그림을 통해서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반대로 그렸고 자신의 감정을 역설적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마돈나 - 뭉크

뭉크의 대표작인 <마돈나>의 모델이 바로 다그니 율입니다. 마돈나는 성경에 나오는 성모이지만 동시에 남성을 파멸로 이끄는 메두사의 이미지로 표현을 했습니다. 뭉크가 여성의 사랑을 갈망하는 동시에 두려워하는 것이 드러납니다.

 

 

 

iii. 툴라 라르센

마지막 여인은 뭉크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린 툴라 라르센이었습니다. 뭉크를 미치게 만든 스토커였죠.

 

눈 안의 눈 - 뭉크

 

툴라는 뭉크가 자신과의 결혼을 미루자 뭉크를 스토킹하기 시작합니다. 뭉크 주변으로 거처를 옮기고 뭉크의 친구들을 통해서 감시했습니다. 그리고 뭉크가 자신을 버렸다는 소문을 내기도 했습니다.

 

 

마라의 죽음 - 뭉크

 

두 사람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마라의 죽음>을 통해서 그 사건에 대한 뭉크의 심정을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죠.

 

죽은 것처럼 누워있는 남자, 뭉크.
벌거벗고 당당하게 서 있는 여자 툴라.

 

툴라는 결혼을 계속 거부하는 뭉크에게 결혼하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협박합니다. 뭉크가 이를 말리는 과정에서 총이 발살 되었고 뭉크의 왼손가락이 산산조각 나게 됩니다. 이 사건 이후에 툴라는 새 남자를 만나 파리로 떠납니다.

뭉크는 남들에게 자신의 손을 보여주지 않고 감추게 되었고, 극심한 공포, 불안증과 피해망상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결국
43세
뭉크 스스로 코펜하겐 정신병원에 입원합니다.

 

그러나 화가로서의 뭉크는 오히려 좋은 기회들을 맞이하게 되는데요,

 

“정신질환이 나의 인생을 지옥으로 떨어지게 만든 측면이 있으나 예술가로서의 활동에는 아주 좋은 것 같다.
불안과 질병이 없었다면 내 인생은 방향을 잃고 떠도는 배와 같았을 것이다.”

태양 - 뭉크

 

1908년 뭉크의 친구가 노르웨이 국립미술관 초대 관장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뭉크의 작품이 국립미술관에 팔리기 시작합니다. 뭉크는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화가가 되고 국왕으로부터 기사 작위까지 수여합니다.

 

<태양>은 1911년 오슬로 대학 설립 100주년 벽화 공모전에 도전할 때 제출한 그림입니다. 태양을 통해서 미래의 희망과 에너지를 표현했습니다. 당시는 노르웨이가 독립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기도 합니다. 이 그림은 노르웨이 화폐에까지 그려졌습니다. 

 

1922년 독일 퀠른에서 열린 분리파 전시회에서 뭉크는 빈 센트, 세잔, 고갱 등과 함께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나 1933년 독일 나치정권이 들어서면서 히틀러의 타깃이 되기도 합니다. 당시 현대미술, 표현주의는 히틀러의 취향이 아니었기 때문에 뭉크 등 표현주의를 퇴폐적, 타락한 미술이라 비난하며 그들의 그림을 압수합니다. 압수한 그림 중 4000여점을 태워버립니다. 이때 뭉크의 여러 작품도 압수를 당하고 남은 작품마저 다 빼앗길 것을 우려한 뭉크는 오슬로시에 모든 작품을 기증합니다.

 

침대와 시계 사이에 자상화 - 뭉크

 

뭉크는 말년에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그렸습니다. 침대는 휴식을 의미하는 동시에 죽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시계 또한 죽음을 상징하는데, 침대와 시계 사이에 서 있는 자신을 그렸습니다. 뭉크는 80세에 사망합니다. 우여곡절이 많은 인생, 평생을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며 살았던 뭉크에게 그림은 유일한 탈출구였던 것 같습니다. 



 

 

 


3. 뭉크의 삶에 나의 삶을 투영해 본다

 

인간은 단면적이거나 양면적이지 않다. 따지자면 다면적 존재다. 면과 면 사이에 무수히 많은 면들이 존재한다. '입체적'이라고 한다.

뭉크의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불행, 불안, 공포 등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반대로 행복을 표현하는 그림들도 있다. 그러나 뭉크 인생을 통째로 훑어보면 그의 작품에는 상반되는 그 두 가지 감정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감정들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모두가 그렇다. 인간은 다면적인 존재다. 행복감을 느끼는 동시에 불안을 느낄 수 있다. 사실은 '그럴 수 있다'기 보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가 그렇다. 과거로부터 쌓아 올려진 경험들과 감정들이 미래를 향해 있는 시선과 어우러져 현재의 내가 '나로서' 존재하게 되는데, 그 감정은 한 단어나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고 복합적이다.

타인에게 나를 소개하고 나를 표현하기 위해서 '이해될 수 있도록' 정리해서 말이나 글 등을 통해서 표현하는 것뿐이지, 내 속에서는 스스로도 정리되지 않아 복잡하다.

그래서 나온 말이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인 것 같다.

대부분은 그렇지 않을까?

 

그래서 성인이 되고도 스스로를 탐구하고 스스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갖는다. 사색이라고 하기도 하고 명상을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표현방법은 다양하지만 스스로를 발견해 가는 과정이다.

뭉크의 일생과 그의 작품을 통해서도 나를 알아가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다. 얼마전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열렸던 뭉크 전시회를 방문했었다.

뭉크의 일생이 그랬듯, 전시된 작품의 분위기는 암울의 끝판왕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림에서는 복합적인 감정이 표출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공감이 됐고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뭉크는 불우한 어린 시절, 연속되는 불행한 사건들을 그림을 그리면서 견뎌냈던 것 같다. 그에게 그림은 감정의 표출 수단이자 숨구멍이었다. 그의 그림을 통해 뭉크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그래서 공감할 수 있었고, 그는 그림을 그리면서 감정을 표출할 수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글이나 말, 노래나 악기 등. 나의 내면을 표출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 중에서 그림만큼이나 나의 복잡한 속내를 표현하기 적절한 수단이 있을까?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감정의 덩어리'인 나를 인정하고 얽혀 있는 실타래 같은 그 복잡함을 하나씩 풀어내 가는 것. 그것을 '표현'이라고 하겠다.

사람은 결국 자신을 표현해가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닐까?

 

 

뭉크의 삶을 보며 공감을 하기도 했고, 나를 보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참고자료>

나무위키 : 
https://namu.wiki/w/%EC%97%90%EB%93%9C%EB%B0%94%EB%A5%B4%ED%8A%B8%20%EB%AD%89%ED%81%AC

벌거벗은 세계사 :  https://www.youtube.com/watch?v=wzy7SAUYsYk
책 : <내 손안의 미술관, 에드바르 뭉크> 김정일 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