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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역사

성경책의 번역, 성경이 한국에 오기까지

by _마디 2024. 8. 20.

성경이 한국에 오기까지

 

종교개혁 이후 성경 번역본들이 쏟아지듯 출판된다.

나라마다 각자 성경이 번역되는 과정이 있겠지만 큼직한 흐름에서 한국을 포함한 4개의 나라를 선정했다.

 

 

 

 

1. 스페인어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로마서 15:22-23,28 개혁한글

 

바울이 쓴 서신서 중 로마서를 보면 '서바나'라는 지명이 나온다.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는 말이 영어로는 "I will leave for Spain by way of you." (ESV) 라고 되어 있다. 바울이 스페인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스페인 지역은 4세기 프리스길리안이라는 사람이 활동했던 곳이기도 하다. 당시는 아직 로마제국 시대였고 라틴어가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었다. 당연히 성경도 라틴어로 된 성경이 상용되고 있었다.

(히에라니무스가 번역한 불가타 성경이 382년부터 시작해 406년에 완성이 되었으니)

 

성경이 스페인어로 번역되기 시작한 것은 13세기부터였다. 로마제국의 멸망 이후 라틴어가 아닌 새로운 언어의 성경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280년 스페인의 왕 알폰소 10세는 스페인어 성경 제작을 위해 후원했고, 톨레도의 한 번역사 학교에서 번역 작업을 시작한다.

알폰소 성경


제롬의 불가타 성경(라틴어)을 스페인어로 번역한 성경이다.

그리고 한동안은 스페인에도 박해의 역사가 찾아온다. 로마에서는 이미 교황 그레고리 9세에 의해서 성경 번역이 금지된 상황이었다.

 

 

 

 

좌 : 카시오도로 데 레이나 우 : 시프리아노 데 발레라

 

약 300년의 시간이 흘러서야 번역 역사의 시계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다. 카시오도로 데 레이나는 히에로니무스 수도원의 수도사였다. 루터교와 접촉을 하면서 개신교 개혁의 추종자가 되어 1478년 세워진 스페인 종교재판소에 찍혀 도망자 신세가 되었지만 그는 망명 중에도 성경을 스페인어로 번역한다. 구약은 마소라 성경 사본을, 신약은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성경을 주로 참고했다고 한다.

1569년 스위스에서 그는 마침내 스페인어 성경 전서를 완성한다.

 

레이나 성경 표지

 

바톤은 그의 친구 시프리아노 데 발레라에게 넘어간다. 발레라는 레이나가 번역한 성경을 개정한다. 

 

레이나와 발레라 성경 표지

 

레이나와 발레라는 수도원 생활을 함께 했고 종교개역부터 도주생활을 같이 한 동료였다.

발레라는 레이나의 성경을 개정 발행한 첫번째 이유로 너무나 소중한 레이나의 성경 번역본이 이미 다 팔려서 더 이상 구입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레이나의 번역본에는 외경들을 제롬의 불가타 성경과 같은 순서로 배치를 했었는데 발레라는 외경을 정경 목록에서 빼서 따로 모아 구약과 신약 중간에 배치를 했다. 확실하지 않은 글들을 확실한 글 사이에, 또 사람의 말을 하나님 말씀 사이에 넣는 것이 맞지 않아서 뺐다고 기록했다.

 

이후 스페인 종교재판소의 권력이 약해지기 시작하면서 18세기 후반부터 새로운 개정판들이 계속 출간된다. 이 과정에서 레이나 발레라 성경에서 외경은 제외되고 스페인어권 사람들의 표준성경으로 자리잡게 된다.

 

현재는 스페인어권의 카톨릭은 1972년에 출간된 라틴아메리카 성경을 대중적이고, 개신교는 레이나 발레라 성경의 1960년 개정판이 대중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2.독일어

 

독일어 성경은 8세기에 마태복음이 처음으로 번역되었고 9세기에는 나머지 복음서와 시편이 번역되었다. 1400년대에 와서 구약성경이 번역되었으며 이 성경이 바로 아우크스부르크 성경이다.

독일어 성경으로 가장 유명한 루터 성경이 있기 전, 종교 개혁 이전에도 많은 독일어 성경이 존재했지만 대부분 라틴어 성경인 불가타 성경을 원문 그대로 번역한 것들이었다. 직역 번역이 많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1517년 마틴 루터가 종교 재판을 받게 되면서 종교개혁의 트리거가 된다. 이후 그는 교황권에게 쫓겨다니는 신세가 되고 바르트부르크성으로 피신하여 숨어지내면서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기 시작한다. 

중점은 평민들도 사용하는 단어로 번역을 하여 일반 사람들도 성경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루터는 계속해서 모두가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1522년 9월 마침내 신약성경의 번역이 끝났고 9월에 발간했다 하여 ‘9월 성경’'이라고 불린다.

 

루터 성경

 

이후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과 헬라어 70인역, 라틴어 불가타 성경을 참고하여 구약번역에도 착수한다. 1534년 구약과 신약의 번역이 모두 완성되어 루터성경 초판이 발행된다.

 

엘버펠더 성경

 

루터성경 이후로도 다양한 성경들이 번역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성경 하나만 보자면, 19-20세기에 번역된 엘버펠더 성경이 있다.

 

19세기 중반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한다. 칼 마르크스는 자본론 등 무신론 사상을 발표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라는 존재에 의문을 품기 시작하는 시기다

동시에 19세기 중반은 고고학이 발전하면서 성경에 나오는 여러 유적들과 유물들이 발견되면서 성경 내용들이 사실임이 입증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성경학자들이 이스라엘, 중동 지역으로 직접 가서 성경의 원본, 사본들을 찾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영국에서 복음주의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독일에서도 그 영향을 받고 복음주의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 에너지에 힘입어 포제크 등 세 사람이 주축이 되어서 성경번역 작업을 시작한다. 1855년 신약성경이 출간되었고 1971년에는 구약이 출간된다.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본을 참고해서 번역한 성경으로 최대한 원본에 가깝게 번역을 하면서도 독일 사람들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문장으로 번역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아직까지 활용되고 있는 번역본들이 더 있지만 넘어가도록 한다.

 

 

 

 

3.영어

 

영국에 성경이 처음으로 전해진 것은 6세기경이었다. 로마 출신의 수도사들이 라틴어로 된 불가타 성경을 가지고 영국으로 들어왔다. 당시 영국은 고대 영어를 사용하고 있었고 라틴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구두로 성경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가톨릭의 부패와 말씀의 변질이었다. 구전으로는 순수한 복음이 전해지기 어려운 상황이 된 것이다.

 

존 위클리프 (1320~1384)
위클리프 성경

 

14세기 무렵 위클리프라는 옥스퍼드 대학의 학자가 등장한다. 위클리프는 성경 영어 번역에 착수하고 롤러드파의 도움으로 번역을 완수한다.

존 위클리프는 1384년 사망했지만 1415년 콘스탄트 공의회에 이단으로 지명당한다. 사망한 지 수십년이 지나 이단이 된 위클리프의 유골을 발굴해서 소각해버리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100여년의 시간이 흐른다. 위클리프 당시 사용했던 중세 영어는 시간이 지나 근대 영어로 바뀌게 되었다. 근대 영어는 셰익스피어가 사용한 영어에 가깝다고 한다.

이때도 여전히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영어 성경의 필요성을 느낀 한 학자가 등장한다.

 

윌리엄 틴들 (1494~1536)

 

윌리엄 틴들이었다. 틴들은 뛰어난 언어학자였고 8개 언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틴들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정식으로 허가받으려고 노력했지만 가톨릭은 이를 거절한다. 오히려 생명의 위협을 느낀 틴들은 영국에서 도망쳐 독일로 피신한다.

 

당시 유럽 대륙은 종교개혁이 한창 진행중이었고 독일에는 금속활자가 활발히 사용되고 있었다. 틴들은 이런 환경에 도움을 받아 신약성경 전체와 구약성경 1/4을 영어로 번역했다.

약 2만부의 번역본이 영국으로 흘러들어갔지만 대부분은 불태워졌고 틴들도 결국 이단으로 몰려 감옥에 갇혔다가 화형당한다.

 

당시 영국의 왕은 헨리 8세였는데 막무가내였던 그의 성격 탓에 당시 영국의 종교적, 정치적 상황이 급변한다. 복잡한 상황들을 생략하고 결과만 말하자면, 틴들의 동료였던 마일스 커버데일은 당시 급변하는 상황을 잘 이용하여 틴들이 진행하던 성경 번역 작업을 이어서 착수했고 완성시켰다. 그러나 성경책에 틴들의 이름을 넣을 수는 없었고 커버데일 성경이라고 이름 붙었다.

 

이후에도 틴들 번역본을 참고한 많은 영어 번역본들이 등장하게 된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헨리 8세는 자신만의 성경 번역본을 가지고 싶어한다. 성경 번역을 지시했고 대성경(Great bible)이 탄생한다.

 

대성경

 

헨리 8세가 죽고 그의 딸 메리가 왕이 된다. 메리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 모든 개신교인들을 말살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많은 개신교인들이 영국을 떠나 스위스 제네바로 도망쳤고 거기 모인 사람들이 또 한편의 번역본을 만들었는데 제네바에서 만들어서 제네바 성경이라고 한다.

 

제네바 성경

 

제네바 성경은 최초의 해설성경이라는 특징이 있다. 좌우 여백에 주석이 빼곡히 적혀있어 가운데 본문을 해설한다.

제네바 성경은 많은 사람들이 참고했는데,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버니언이나 셰익스피어도 그들 중 한 사람이다. 청교도인들이 신대륙으로 이주를 할 때 들고 갔던 성경도 이 성경이라고 한다. 후에 이 성경이 신대륙 원주민들의 언어로 번역되어 전파되기도 한다.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서 메리를 이어 왕위에 오른 엘리자베스 1세는 카톨릭과 개신교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한다. 이 시기에 영어 번역본 감독 성경이 출간되었지만 널리 퍼지지는 못했다.

 

엘리자베스 다음 제임스 1세가 왕이 되었고 전대와 마찬가지로 영국국교회(성공회)와 개신교 사이의 분쟁을 조정하는데 애를 썼다.

이때 영국 국교회는 제네바 성경의 칼뱅주의적 해석을 문제 삼았고, 개신교인들은 감독 성경을 문제 삼으면서 둘 사이에 큰 갈등이 생긴다. 제임스 1세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새로운 번역 작업을 지시한다.

 

54명의 학자들이 모여 감독 성경과 틴들, 매슈, 커버데일, 대성경, 제네바 성경 등을 참고하여 번역 작업에 착수한다. 54명은 6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서 각자 번역한 것들을 서로 검수했고 마침내 1611년 킹 제임스 성경이 출간된다. 수 차례 검수를 했지만 오탈자가 많아서 여러 차례 개정이 된다.

이 성경은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읽히는 성경이 된다.

 

 

 

 

한국어

마지막으로 한국어 성경이다.

 

1) 한국 기독교 전파의 배경

기독교에 관련된 한국의 최초의 기록은 일본과 한국에 전쟁이 일어났던 임진왜란 시기인 1593년이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로마카톡릭 예수회 선교사들은 복잡해진 유럽대신 해외지역에 카톨릭을 확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국과 일본에 카톨릭 신부들이 파견되었다.

 

일본은 조총 및 새로운 기술을 얻기 위해 선교사들과 교류하였고 그로 인해 일본에 카톨릭 신자들이 생겼다.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을 침공했던 장군인 고니시 유키나가와의 부대원들은 그 영향을 받은 천주교인이었다. 고니시를 따라서 포루투갈에 예수회 선교사 세스페레스가 1년동안 조선 남부 창원지역에 머무르며 조선인 포로들에게 선교했다는 내용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기독교가 제대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중국을 통해서였다. 조선사람들은 기독교를 종교보다는 일종의 학문으로, 서학이라 부르며 중국에 전파된 것을 책을 통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때 조선에서는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리치가 1603년 중국사람들을 위해 지은 천주교 입문서 천주실의가 유행했다.

 

천주실의

 

정조 때 수원화성을 설계한 정약용이 천주교를 받아들인 인물로 유명하다.
그러나 기독교 사상은 당시 조선의 대세인 유학과 맞지 않았고 서양국가들의 침략에 대한 위기감으로 인해 박해와 핍박으로 이어진다. 5번의 큰 박해를 통해서 조선의 천주교인들은 큰 핍박을 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순교하게 된다. 그렇지만 천주교는 박해 속에서도 조선에 많이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서양에 알려지면서 개신교 역시 조선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시도를 한다. 하지만 외국사람을 배척하는 분위기에, 피부색과 머리색이 다른 서양인들이 직접 조선인들을 만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한국의 복쪽 지역인 평양에 상륙하여 성경을 전하려던 토마스 선교사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는 제너럴 셔먼호가 외교협약 없이 대동강을 따라서 평양까지 접근해 무역을 요구한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고 조선 군인들이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워버렸기 때문이다. 이때 토마스 선교사가 배에서 헤엄쳐 나와 중국어로 된 성경을 대동강 주변에 있는 조선인에게 전하고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으로 인해 조선과 미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로버트 저매인 토마스

 

조선이 일본을 시작으로 서양 국과들과도 수교를 시작하면서 개신교 역시 한국에 정식으로 포교를 허락받기 시작한다.

미국 북장로교회가 1884, 미국 북감리교회가 1885, 침례교가 1889, 성공회, 캐나다 장로교회까지 차례로 선교사를 조선에 파견하기 시작한다. 이때 한국에 여러 선교사들이 들어오는데, 그 중 감리교의 아펜젤러는 한국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인 배제학당을 설립한다. 한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가르치기도 했다.

 

미국 북장로의 언더우드는 훗날 연세대학교로 발전되는 학교를 만든 것으로 유명하고 의료 선교사였던 알렌은 한국 최초 서양 병원 광해원을 만들었고 이후 주한미국 정권 공사까지 역임하면서 한국 역사에 영향을 끼쳤다.

이외에도 여러 국가에서 파견한 선교사들로 인해 개신교가 본격적으로 조선에 전파되기 시작했다.

 

이런 배경에서 한국어 성경이 번역된다.

 

 

2) 한국어 성경 번역

한국에 선교사가 상대적으로 유명한 중국과 일본 지역에 먼저 파송된 이후 한국의 존재를 알게 되어서 한국에도 선교사가 파견되었듯이 성경번역도 중국과 일본에서 먼저 시작된다.

 

조선시대는 공식문서에 한자를 사용했기 때문에 지식인층은 중국에서 만든 한문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백성들은 한자를 읽지 못했다. 조선에 기독교를 널리 전하기 위해서 한글로 번역된 성경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진 선교사들이 생겨났다. 스코틀랜드 장로회에서 중국 만주지역으로 파견된 존 로스와 존 메킨타이어였다.

그들은 조선에 들어가지 못하고 국경지역에서 한문을 한글로 번역이 가능한 조선 사람들을 구했다. 그렇게 구해진 사람이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이성하 등의 조선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성경을 번역하는 과정 속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이후 평안도 지역에 기독교를 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로스와 메킨타이어는 자신들이 한국어를 공부해서 만주에서 조선사람들이 중국어 신약성경을 번역한 내용을 그리스어와 영어성경을 대조하면서 검토 수정하는 방식으로 성경번역을 진행했다.

 

누가복음전서

 

그렇게 처음으로 번역된 것이 누가복음으로 18823월에 완성되어서 3천부가 인쇄되었다. 이후에 요한복음, 마가복음, 사도행전, 로마서 순으로 순차적으로 진행되어 각각 3~5천부씩 인쇄되었으며 1887년에는 신약성경 전체를 완성했다.

 

다음 소개할 번역본은 신약전서다.

 

예수셩교젼셔 신약전서

 

중국 심양의 문당서원에서 번역이 진행되었다. 당시 한글활자가 제대로 없어 목판에 글자를 직접 새긴 후에 일본에서 납활자 4만개를 제작한 후에야 인쇄할 수 있었다.

 

이 성경은 두 가지 원칙을 기준으로 번역되었다.

1. 본문의 의미와 한국어의 관용어에 적합한 절대적인 직역이라는 원칙과

2.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민중의 언어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원칙 속에서 번역이 진행되었다.

 

키포인트는 직역민중의 언어이다. 직역은 그 나라말에 없는 표현이라 당장 이해가 안 되더라도 단어 뜻 그대로 번역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는 것이다. 이는 초대 교회부터 이어진 성경을 정확하게 한국사람에게도 전하려 함을 중요시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민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한글로 번역함을 원칙으로 해서 성경 자체가 널리 알려지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성경번역이 준비되는 동안 일본에서도 중국과는 별도로 성경번역이 준비되고 있었다. 중국에서 성경번역은 한문을 한글로 바로 번역했다면 일본에서는 중국어 성경에 이두(吏讀)식으로 한글음을 붙이는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이수정

 

조선인 이수정이 일본에 머물면서 1884년에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번역했던 것이 시작이었다.

 

 

1885년에는 마가복음을 한글과 한문이 섞여 있는 국한문병용체로 번역하여 출간했는데 이때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중국식 표현인 야소 기독(耶蘇基督)’에서 원래 발음에 맞게 예슈스 크리슈도스로 번역했다.

 

중국과 일본에서 번역된 성경들은 조선이 서양국가들과 외교관계를 맺고 선교사 파견이 허용되면서 조선에서 활용되기 시작했다.

 

이후 구약성경의 번역과 초기번역된 성경의 개역 필요성을 느끼고 188727, 한국에 파견된 다양한 교파의 선교사들과 조선인들이 모여서 성서번역 위원회를 만든다. 이때 참여한 사람들이 언더우드, 아펜젤러, 알렌, 스탠턴, 헤론 등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이수정이 일본에서 번역한 마가복음을 한글로 개혁하는 것을 시작으로 사복음서를 차례로 발행했고 중국에서 번역된 로스버전의 신약성경을 수정하는 작업부터 성경 전체 번역작업이 시작되었다.

 

19026, 아펜젤러와 조한규 등의 인원이 번역작업을 위해 배를 타고 목포로 가던 중 선박 충돌사고가 났고 이로 인해 안타깝게 그들은 사망하였고 그들이 함께 작업했던 성경 번역자료도 같이 수장되었다.

 

한국에 있던 선교사들과 선교단체들은 이 상황을 맞고 큰 결단을 내린다. 이 일로 중요한 성경번역 작업을 멈출 수 없었기에 선교일과 번역작업을 공동으로 집행하던 사람들 중 몇 명을 아예 전임번역자로 임명해서 이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로 한다.

 

성경번역자회

 

선교사 게일과 언더우드, 레이놀즈, 조선인 이창진, 정동명, 송덕조, 김정상, 이승규가 전임 번역자로 임명된다.

 

이들은 4년동안 552회에 달하는 모임을 거치고 몇 번의 개정작업을 통해서 1906년에 신약개정본 최종본을 완성한다. 이 신약전셔는 총 5만부가 발간되어 조선 전역에 퍼져 나간다.

 

신약전서가 완성된 후에 바로 구약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한다. 기존팀에 유대인이면서 시편을 먼저 번역했던 알렉산더 알버트 피더슨과 선교사 글리던 크렘 등이 합류해서 더욱 박차를 가한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1911년에 구약전서도 번역이 완료되어 한국에 신구약 성경이 모두 번역된다.

 

관주 성경전서
순한글 성경

 

1930년에 대영성서공회에 도움을 받아 발행된 관주 신약전서는 장과 간주를 제외하고는 순한글로 되어 있으며 현재 한국에서는 사용하고 있지 않은 아래하 같은 기호가 보인다.

 

일제강점기 시대였던 1936년에 구약을, 1938년에는 신약을 재개정하여 완성도를 높였고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에 한글맞춤법 통일안에 의거하여 수정한 뒤에 성경전서 개역한글판이 발행된다. 이 성경은 전쟁 중이던 상황에도 인쇄되어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개역한글판은 존 로스가 중국 만주에서 1887년에 만든 성경을 기초로 해서 한국에서 언더우드, 아펜젤러, 레이놀즈 등이 1911년에 완성한 것을 1938년에 재개정하고 1952년에 한글맞춤법에 맞게 수정하고 1961년에 일부 수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1911년부터 1961, 50년동안 히브리어, 그리스어, 영어 등 온갖 외국 사본과의 비교를 통해 정확도를 검증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개역한글 성경은 한국 교회에 많은 역할을 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현대어로 된 새로운 번역을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생겨났다. 세대가 바뀔 때마다 이런 요구들이 있었고 몇 번의 개역한글에 대한 개정 노력이 있었다.

 

 

첫번째 시도는 1967년도에 출간된 새번역 성경이다. 두번째 시도는 새번역을 다시 한번 개정하여 1993년도에 출간된 성경전서 표준새번역이다. 세번째 시도는 1998년에 출간된 개역개정이다.

 

성경 고린도후서 416절로 이 성경들의 차이를 비교해보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 개역한글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 새번역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 개역개정

 

개역한글에서 새번역은 말투와 일부 단어가 바뀌었다. 반면 더 늦게 번역된 개역개정에서는 말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단어가 달라졌다.

새번역과 개역개정 모두 한국성서공회에서 진행했지만 차이가 있는 것은 두 번역의 목적이 달랐기 때문이다. 새번역은 성경을 조금 더 쉬운 현대말로 번역해서 청년층과 새로 성경을 보는 사람들이 쉽게 성경을 접하게 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개역개정은 2011년에 저작권이 만료되는 개역한글을 본격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오랫동안 익숙해져 온 개역한글의 말투를 유지한 채 현재 사용하지 않는 단어들을 현대 단어로, 과거의 맞춤법을 현재 맞춤법과 띄어쓰기로 번경했다.

개역개정이 나온 후에 한국성서공회에서는 개역한글의 인쇄를 대부분 중단하고 개역개정판으로 번경했다. 현재 한국 서점에서 특별히 확인하지 않고 성경을 선택하면 개역개정판을 구매하게 된다.

 

 

 

 

마무리

긴 여정이 끝났다. 성경이 쓰여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한국인의 손에 들어오기까지의 흐름을 살펴봤다.

가까스로 역추적 할 수 있을 정도의 자료들만 남아있다는 점이 신기했다. 큰 변질없이 성경이 복사되고 번역되어 전해 내려왔다는 것을 신뢰할 수 있을 정도로만 기록과 자료, 사료들이 남아 있었다.

그것도 이렇게 하나하나 역추적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하게.

 

자료를 찾아보면서 이걸 왜 하고 있나 싶을 때도 있었고

마무리는 꽤 허접하게 끝이 난 것 같긴하지만 나름대로 스스로 찾아보고 정리하는 공부시간이었던 것 같다.

또 꽂히는 주제가 생기면 프로젝트성 글을 쓰게 되겠지.

 

 

 

 


참고자료

 

스페인어 성경 이야기
https://keepbible.com/Cmn1/View/420

 

중세 스페인의 성경 번역
https://www.jw.org/ko/%EB%9D%BC%EC%9D%B4%EB%B8%8C%EB%9F%AC%EB%A6%AC/magazines/wp20140301/%EC%A4%91%EC%84%B8-%EC%8A%A4%ED%8E%98%EC%9D%B8%EC%9D%98-%EC%84%B1%EA%B2%BD-%EB%B2%88%EC%97%AD/

 

카시오도로 데 레이나
https://en.wikipedia.org/wiki/Casiodoro_de_Reina

 

시프리아노 데 발레라
https://en.wikipedia.org/wiki/Cipriano_de_Valera

 

레이나 발레라(1602) 성경
https://archive.org/details/ReinaValera-1602/mode/2up

 

달비성경(엘버펠더 성경)
https://en.wikipedia.org/wiki/Darby_Bible

 

[배경]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 한글 성경 번역
https://www.1907revival.com/news/articleView.html?idxno=330

 

특별기고10)로스와 매킨타이어의 최초 우리말 성경 번역
https://www.kidoktimes.co.kr/7630

 

고본성서 원문 보기
https://www.bskorea.or.kr/bbs/content.php?co_id=subpage2_3_3_4

 

한글성경 번역사 대한성서공회
https://www.bskorea.or.kr/bbs/content.php?co_id=subpage2_3_3_1_3

 

[책] 성경 번역의 역사
https://www.yes24.com/Product/Goods/5404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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