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사본의 제작과 번역의 역사
성경책의 역사 두번째 글이다. 첫번째 글에서는 성경책에 쓰인 내용의 신뢰성에 대해서 써봤다. 사본 제작과 번역과정 중에서 내용의 변질은 없는지, 지금 읽고 있는 이 내용이 원본과 얼마나 유사한 지 등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번에는 사본의 제작과 번역으로 주제를 잡았다.
성경의 내용을 기록하고 전달하기 위한 사본 제작의 과정과 그 과정에서 번역된 성경에 대해서 알아봤다.
Part1. 사본 제작
1. 기록 도구의 발전
파피루스
인류 최초의 기록은 프랑스 남부 지역에 있는 쇼베 퐁 다르크 동굴의 석화라고 한다. 대략 3만 2천년 전의 기록이라고 추정한다. 벽화를 지나 쐐기 문자가 새겨진 점토판도 많이 발견되었는데 지금까지도 잘 보존되어 있는 것들이 많다. 찾는 자료마다 주장이 달라서 확신하기 어렵지만 약 7000-4000년전부터의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4000년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많이 발굴되는 모양이다.
그 다음에 나타나는 것이 종이의 조상격 되는 파피루스다. 파피루스는 이집트 나일강변에 많이 서식하는 식물로 줄기를 발라내어 가로 세로로 엇걸어 놓고 두들겨서 얇게 펴 말려 종이로 만들었다. 파피루스는 식용이나 배를 만드는 데에서 사용되었다.
양피지
파피루스 다음으로 양피지가 탄생한다. 양피지의 등장은 한참 나중이긴 하다. 부상하는 그리스(헬라) 지역의 견제를 위해 이집트는 효자 수출품인 파피루스의 수출을 금지했고 대체품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렇게 도시 국가였던 페르가몬에서 파피루스의 대체품으로 양피지를 만들게 된다. 양피지를 뜻하는 영어 단어 parchment는 '페르가몬의 종이'라는 어원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다른 자료에서는 위의 일화는 거짓말이고 이미 페르가몬 이전부터 동물의 가죽에 기록을 남겼다고 한다.
양피지의 제작과정은 파피루스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동물의 가죽을 얇게 벗겨내서 털을 제거하고 가죽을 손질하고 얇게 펴는 등 굉장히 손이 많이 가고 번거로운 공정의 연속이다. 게다가 파피루스에 비해 엄청나게 비쌌다. 보통 양피지로 두루마리 형태의 책을 한 권 만드는데 양이 20~30마리가 필요하다.
만약 성경책 한권을 코덱스 형태의 책으로 만든다면 송아지를 160마리 정도 잡아야 했다. 당시 시세로 성경책 한 권의 가격이 집 한채를 가뿐히 뛰어넘었다고 한다.
심지어 인쇄기술이 없던 당시에는 한 사람이 책을 필사하려면 1~2년이 소요됐기에 책값은 훨씬 더 비쌌다. 그러다가 15세기 중반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금속활판 인쇄술을 개발한다. 인쇄기는 한 사람이 1년 동안 해야했던 일을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아서 끝냈다. 일주일만에 수백권의 책이 찍혀 나왔고 인쇄술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2. 인쇄술의 발명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개발한 시기를 1430~1440년 정도로 보는데, 1500년쯤에는 이미 독일 곳곳에 300개가 넘는 인쇄소가 생겼다고 한다.
12~13세기부터 상용화되기 시작한 종이와 15세기에 개발된 인쇄술의 컬리버레이션으로 약 100년후에는 집 한채 가격이었던 책의 값이 1/10정도로 줄어들게 된다. 인쇄기술은 훗날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모세는 파피루스에 율법을 기록했고 바울은 양피지에 기록된 성경을 읽었다. 조금 더 긴 시간이 지나서 현재와 같은 종이가 발명되었고 인쇄술이 개발되어 많은 기록물들이 지금 우리가 보는 책의 형태가 되었다.
Part2. 번역서
성경책이 어떻게 번역되어 왔는지의 흐름을 잡기 가장 쉬운 방법은 대표적인 번역책들을 알아보는 것이다. 몇 가지 대표되는 책들을 알아보기로 했다.
1. 70인역 성경
이스라엘은 히브리어를 사용한다. 성경도 당연히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다. 그런데 구약성경은 히브리어 말고도 다른 언어가 조금 들어가 있다.
다니엘이 기록한 다니엘서의 일부가 아람어로 기록됐는데 BC586년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바벨론 유수 시절, 다니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 있던 시절에 기록했기 때문이다. 성경을 믿는 사람들은 세계 역사 속에 펼쳐질 미래의 예언을 당시 국제통용어로 사용되었던 아람어로 기록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쨌든 일부의 아람어와 대부분의 히브리어로 기록된 성경은 가장 먼저 헬라어(헬레니즘 그리스어)로 번역된다. 이건 구약성경이 40여명의 사람들에 의해서 굉장히 오랜기간 기록되었던 영향도 있다.
BC1500년 쯤 모세부터 시작된 기록이 BC400년쯤까지 이어져 내려온다. 긴 시간 동안 국제 정세는 끊임없이 바뀌었고, 앞서 말했듯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시기도 있었다. 구약의 마지막이 기록됐을 시점에는 페르시아가 세계를 지배하는 패권국가가 되었고 헬라어가 세계 공용어가 되었다.
그 사이 여러 사건들이 지나갔고 디아도코이 시기를 거쳐 4개로 분열된 페르시아 중 이집트 지역을 다스리던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이쯤에서 등장한다.
당시 이집트에는 톨레미 2세 전대 왕부터 짓기 시작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있었는데 톨레미 2세때 완공이 된다.
BC250년경 톨레미 2세는 도서관에 보관하기 위해 유대 율법 학자들을 불러 모아서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라 명한다. 썰에 의하면 이스라엘 12지파별로 6명씩 학자를 모아 총 72명이 번역 과정에 착수했다고 한다. 그렇게 70인역 성경이 탄생한다.
신약성경은 최초 기록될 때부터 헬라어로 기록이 되었는데,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페르시아가 망하고 로마가 패권국이 되었을 때 구약과 신약이 한권으로 묶이고 헬라어로 된 성경책이 라틴어로 번역된다.
히에라니무스의 불가타 성경이라고 한다.
2. 불가타 성경
AD313년 콘스탄티누스에 의해서 길고 길었던 기독교 박해가 종결된다. 이후 역사에도 박해는 계속되지만 한 숨 돌리는 시간이 찾아왔다. 380년 테오도시우스는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했다.
이때부터 서서히 종교는 국가 세력과 결탁하게 되고 세속화 된다. 이런 상황이 싫어서 속세를 떠나 고행을 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수도사라고 부른다. 최초의 수도자라고 할 수 있는 안토니우스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는데, 그 중 한 사람이 히에로니무스(제롬)였다.
제롬은 헬라어 성경들을 한 데 모아 라틴어로 번역작업을 시작했다. 당시 교황이었던 다마소 1세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아무튼 그는 이스라엘 땅으로 가서 번역 작업에 착수했고 70인역을 메인으로 히브리어 사본을 참고하여 번역했다.
'불가타'라는 말은 대중이라는 의미인데 대중을 위해 쉽게 번역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책이 번역되고 처음에는 언어의 수준이 품위가 없다는 이유로 환영받지 못했다. 이후 수백년이 지나서야 로마 교회가 불가타 성경을 표준으로 제정한다.
7세기쯤에는 모든 성경 중에 가장 권위 있는 성경이라는 인식이 생겼고, 9세기에는 절대적인 권위가 생겨 라틴어 이 외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것이 금지되기까지 한다. 이것도 마냥 순수한 마음으로 성경의 권위를 치켜세우려던 것은 아니고 권위자들의 흑심이 있었던 결정이긴 했다.
제롬의 성경이 불가타 성경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13세기가 되었을 무렵부터였다. 1611년 완성된 킹제임스 영어성경도 불가타 성경을 기반으로 번역한 성경이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라틴어 성경이라고 하면 불가타 성경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성경이 번역된 당시는 헬라어가 접어들고 라틴어가 대세가 되었던 시기이기에 라틴어 성경은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는 데에 도움이 되었지만 시간이 지나서 한권의 책이 가질 수 있는 권위의 허용량을 넘어서니 문제가 되었다.
번역 금지령과 투쟁하는 역사가 시작되었다.
3. 번역 금지령
1229년. 프랑스 남부 툴루즈 지역에서 회의가 열렸다. 회의의 주체자는 당시 교황이었던 그레고리 9세.
이 회의에서 크게 두 가지 내용이 발표가 된다.
첫번째는 "평신도들이 라틴어 시편을 제외한 모든 성경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것과
두번째는 "성경의 어떤 부분도 라틴어 이외의 언어로 번역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때는 이미 라틴어는 일반 시민들의 언어가 아니었다. 형식상으로는 라틴어 성경의 권위를 세우고 오해석을 막겠다는 명목이었겠지만 실질적으로는 평신도들이 직접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하는 법령이었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은 사람들이 성경의 내용과 로마 교회의 가르침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고 로마 교회의 요구나 가르침을 듣지 않는 일이 자꾸 생겼기 때문에 직접 성경을 읽을 수 없도록 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일이 영국에서도 14-15세기에 또 일어난다.
14세기 영국에 위클리프라는 학자가 있었다. 그는 영국 사람들이 영어로 성경을 읽게 하기 위해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했다. 위클리프는 최고의 권위는 교황에게 있지 않고 말씀에게 있다고 말하며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직접 읽고 깨닫기 바랐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인 영어로 번역하고자 했다.
하지만 위클리프는 이단 취급을 받았다. 심지어 위클리프가 죽은 후에 로마는 그를 이단으로 정죄해 그의 책들을 다 불태웠고 1408년에는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위클리프 성경을 금지하는 조항을 발표했다.
“이제부터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권위로 성경의 어느 본문이든지 영어나 다른 언어로 번역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존 위클리프 시대나 그 후에 만든 책자를 읽어서도 안 된다“
영어 번역을 금지하는 조항이었다. 이것을 위반할 경우 사형에 처해질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이 중세시대 끝까지 이어진다.
1517년, 종교개혁이 일어나고야 비로소 각 언어로의 번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게 된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에도 다른 언어로의 번역 요구와 태동이 계속 있었는데, 불가타 성경도 이미 번역이 된 성경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원어성경 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지기는 어려웠다.
원어 성경은 역사적인 흐름을 따라서 유럽으로 유입되었고 라틴어 성경의 권위를 흔들고 다른 언어로의 번역 욕구에 불을 지폈다.
이 흐름을 추적하기 위해 로마가 동서로 분열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395년 로마는 동과 서로 뉜다. 서쪽은 로마를 중심으로, 동쪽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뭉친다. 서로마 사람들은 라틴어를 위주로 사용했고 라틴어 성경을 많이 봤고 동로마는 헬라어를 위주로 사용했고 책도 헬라어로 읽었다.
476년 서로마가 멸망하고 동로마는 역사를 이어가다가 1000년 뒤, 1453년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제국에게 함락당한다.
동로마가 이슬람 세력에게 함락당하자 거기 거주하던 사람들은 서쪽으로 피신을 하는데 이때 동쪽에 있던 많은 헬라 문물들을 가지고 들어간다. 새롭게 유입된 문물들이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한다.
이때 같이 들어오게 된 것이 헬라어 성경이었다. 서유럽 사람들이 헬라어 사본을 접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히브리어 성경은 비슷한 시기에 스페인에서부터 확산이 된다.
1492년 르네상스가 한창이던 시기 당시 스페인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스페인에 유독 많은 유대인들이 거주하게 된 이유도 이슬람 세력과 관련이 되는데, 스페인이 이슬람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유대인을 추방하는 알함브라 칙령이 발표된다. 1498년에는 포루투갈에서도 비슷한 정책을 펼친다.
유대인들은 쫓겨나면서 재산을 몰수당했는데, 유대인 입장에서는 토사구팽 당하는 꼴이었지만 하는 수 없이 대부분의 재산은 그대로 두고 나라를 떠나야 했다. 이때 몰수된 재산이 콜롬버스 신대륙 원정의 지원 자금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유대인들이 많은 재산과 함께 자신들이 보던 히브리어 성경책도 두고 떠난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서유럽 사람들이 원문 성경을 접하게 되었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4. 다양한 번역본들
원어성경에 관심을 가진 많은 사람들 중에 대표 주자격 되는 사람이 스페인 추기경 히메네스와 에라스무스다.
히메네스는 1500년경 스페인의 동쪽 한 지역에 대학을 짓고 거게에서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셩경을 연구했다. 그리고 세 단으로 이루어진 성경책을 출판한다. 콤플루툼 폴리글롯이라고 한다. 콤플루툼은 지역 이름이고 폴리글롯은 '여러 언어'라는 의미다.
가운데 라틴어를 중심으로 왼쪽은 헬라어, 오른쪽은 히브리어를 배치했다. 세 언어를 같이 보면서 성경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이같은 형태의 책을 출간했다.
에라스무스는 불가타 성경의 개정을 시도했다. 아무리 원어성경에 밀려 권위가 흔들리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당시 공인된 성경의 권위를 가지고 있던 책의 수정은 상당히 위험해 보이는 시도였다.
에라스무스의 시도는 성공했다.
왼쪽 단은 헬라어 본문, 오른쪽 단은 불가타를 개정한 라틴어 번역본이다. 헬라어 본문을 번역했기 때문에 내용의 정확성과 권위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에라스무스의 이러한 시도는 후에 종교개혁가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데에 큰 흐름을 만들어 낸다.
종교개혁의 첫주자인 마르틴 루터도 이의 영향을 받았다. 1517년 95개조 반박문으로 종교개혁의 포문을 열었고 1521년 로마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지목당했지만 굴하지 않고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한다.
1534년 신구약 완전본 성경을 출판한다.
이후로 번역의 줄기는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프랑스, 핀란드, 스페인, 이탈리아 등으로 빠르게 흘러간다.
1569년에는 스페인어 완역본인 레이나와 발레라 성경이 출판되었고 1611년에는 유명한 영어성경 킹제임스 성경이 출간된다.
마무리
종교개혁 시대의 번역의 역사까지를 살펴봤다.
이번에도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워낙 배경지식이 없다 보니 서로 다른 내용이나 연도가 소개되면 많이 혼란스러웠다.
그렇다고 이 이상 전문적으로 알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이번 내용은 사실이냐 아니냐를 논할만한 꺼리는 아닌 것 같다.
그냥 전반적인 세계사 흐름에서 성경을 믿는 입장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이런 내용을 뽑아낼 수 있겠다는 정도.
잘못 알고 있는 부분도 있고 틀리게 쓴 내용도 있겠지만 보일 때마다 수정해가면 될 것 같다.
참고자료
프랑스 남부 퐁다르크 지역 동굴에 3만2천년 전 그린 그림 발견
How a Gutenberg printing press works
추가 읽을 거리
한국최초 성경전래지기념관에 전시된 1,100년 전 세퍼토라
세계 최고(最古) ‘히브리어 성경책’ 공개…낙찰 추정가만 650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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